배낭족 2 파리의 욕망이 향하는 곳

2019. 3. 1. 17:05유럽의 추억

영국을 떠난 나랑 동생은 당연히 파리로 향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파리 중앙역에 내렸는데 웬 중년의 백인 남자가 한국어 손글씨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우리에게 곧장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좋은 방 있어요’ 

나랑 동생은 놀란 눈으로 덤벼들다시피 종이를 받아들고 자세히 뜯어보았다. 남자는 서툰 영어로 자기 집에 남는 방이 있는데 싼 값에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물론 공중전화를 써야 했던 시절이다.


남자가 내민 전화기 너머에서는 젊은 한국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다시피 통화를 하고 나서 설명을 들은 대로 지하철을 타고 파리 교외 지역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먼 길이었다. 한 시간쯤 걸리는 듯했고, 지하철 역에 내려서도 작은 계곡 같은 곳 옆으로 난 오솔길을 한참 걸어올라가야 하는, 파리 근교의 전원 마을이었다. 약간 속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방값이 쌌고 또 말이 통하는 동포의 집에서 머물게 되어 좋았으니까.




전원마을이라고 해서 그다지 좋은 집이거나 단독주택은 아니었고, 우리가 마침내 찾아낸 집은 평범한 유럽식 좁은 아파트의 2층이었다. 검은 생머리를 반가르마 타서 늘어뜨리고 헐렁한 통원피스를 입은, 오노 요코를 닮은 한국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몇 년전 파리로 사진을 배우러 유학 왔는데, 프랑스 남자랑 동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동거를 전혀 나쁘게 보지 않는 자유로운(?) 곳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날 밤 우리가 자게 된 방의 얇은 벽을 통해서 커플의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농non~ 농~” 하는 교태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no means no는 아닌 듯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한 시간씩 걸려 출퇴근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찍 나가는 건 불가능했고 무진 노력해도 파리 시내 관광지에 도착하면 점심 시간이 살짝 넘어 있곤 했다. 우리는 피로감도 쌓이고 취향도 달라서, 점점 행선지가 갈리다가 마침내 숙소를 나서는 시간도 각자 다르게 됐다. 생각해 보면,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같이 등하교를 한 적이 없는 서먹한 연년생 자매가 유럽 여행을 같이 온 자체가 의외의 일이었다.


나는 주로 미술관을 다녔다. 오르세 미술관과 로뎅 미술관이 기억에 남고 특히 로뎅 미술관에서 본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에 꽤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최신 시설로 가득했던 퐁피두 도서관도 인상 깊었다. 


최소 비용으로 여행중인 배낭족 신세라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삼시세끼를 샌드위치로 때우다가 점차 과자점 진열창마다 알록달록한 조각 케이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노란 버터크림 케이크의 시대가 간신히 끝나고 막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는데,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조각내어 파는 다양한 파이와 케이크의 신세계를 접한 것이다. 나는 점차 끼니를 조각 케이크로 때우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여행지인 파리에서 기력이 반쯤 소진된 나는 우연히 찾아낸 식물원 벤치에 늘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거기 앉아서 빵이나 케이크를 먹고 있노라면 노인들이 지나가며 “쁘띠 데제네(아침식사 혹은 간식)?” 라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 파리는 사실 내 인생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도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남자 노인과의 키스다. 그렇게 지나가며 인사를 건네는 노인도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 노인도 정말 많았다. 그러다가 한 노인은, 내가 이만 일어서겠다고 하자, 파리에서는 작별의 키스를 꼭 해야 한다며 양볼에 뽀뽀를 하는 척하다가 내 어깨를 꽉 잡아당기며 입술에 거세게 키스를 해버렸다. 그때의 느낌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아마도 파리에서부터 서서히 경험하기 시작했던 남유럽 특유의 길거리 구애, 혹은 성희롱 문화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특히 거리에서 동양인 여성 여행객들을 향한 남자들의 집적거림은 거의 파리떼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무척 성가셨고 또 무서운 경우도 가끔 발생했다. 


그렇게 파리에서 역시 일주일이 좀 안 되게 머물고 나서 기차를 타기 전에, 나랑 동생은 모처럼 맥도날드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말다툼을 시작했다. 동생은 곧 맥도날드를 뛰쳐 나갔고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울면서 맥도날드를 나가 기차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며칠 뒤에 집에 전화해 보니, 엄마가 난리를 치면서 왜 이제야 전화를 했느냐고, 동생은 그동안 매일 전화해서 언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헤어진 그날도 30분 있다가 다시 맥도날드로 돌아가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속상해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