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족 1 영국의 자매와 고추장

2019. 2. 27. 21:33유럽의 추억

슬슬 대학 생활이 싫증 날 무렵, 3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으며 원없이 놀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다. “미국으로 6개월 어학 연수 갈래, 유럽으로 두 달 배낭 여행 갈래?” 왠일로 큰돈을 대줄 뿐 아니라 선택의 옵션까지 주겠다는 거였다. 난 당연히 두 달 유럽 배낭 여행을 선택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과 동생의 친구 한 명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우리 여자 셋은 거의 자기 몸집만 한 크기의 배낭을 사고 서울의 여행사에서 왕복 항공권과 유레일 패스를 샀다. 숙박은 런던 도착 첫날 단 하루만 어느 호텔을 예약했다. 다른 정보나 그 외의 준비는 [세계를 간다]라는 두꺼운 여행책 한 권이 전부였다. 비행기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던 시절이었다.


7월이었지만 런던은 꽤 쌀쌀했다. 그 큰 배낭에 나시티와 핫팬츠만 꽉꽉 채워넣어 가지고 갔던 나는 벌벌 떨다가 결국 긴바지와 반팔티를 하나 사서 영국에서는 내내 그것만 입고 다녔다. 그리고 낮이 너무 길어 거의 밤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던 환경도 너무 뜻밖이었다. 시차 문제도 있어 늘 몽롱한 기분으로 오후 같은 햇살이 내리쬐는 런던 밤거리를 헤매다녔던 것 같다.


나도 동생도 그다지 계획을 세우며 노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동생의 친구는 달랐다. 서울에서부터 철두철미 계획을 세우고 온 그녀 덕분에 우리 자매는 꼭두새벽부터 대영박물관이라든가 코벤트가든이라든가 부지런히 끌려다녔고 어딘지 기억 나지 않는 스코틀랜드까지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별로 기억 나지 않는 영국에서의 일정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한 두 가지 기억은 저녁 때 큰맘먹고 펍에 가서 생선 감자 튀김을 시켜서 먹다가, 20대 초반 배낭 여행객의 왕성한 식욕으로도 도저히 소화 못 시키고 반 넘게 남기고 나온 일과,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역시 펍에 가서 전형적인 브런치를 먹다가, 온 동네 남자 노인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한몸에 받고 불편하던 추억뿐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하이드파크에서 퍼질러 누워 찍은 사진이라든가 어디선가 자전거도 타고 그러고 있던데, 도무지 당시의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랑 동생은 친구의 강행군에 좀 질려 있었고, 친구 역시 게으른 우리 자매를 끌고 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일주일 좀 안 되게 영국에서 보낸 후, 그녀는 이제부터는 자기 혼자 다니겠노라고 했다. 나와 동생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친구는 아일랜드로 가기로 했고, 나랑 동생은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긴장감과 피로에 반쯤 넋이 나간 나는 엄마가 유리병에 싸준 고추장을 열었다. 동생은 냄새가 너무 난다고, 창피하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들은 척 만 척 고추장을 바게트에 푹푹 찍어 하염없이 삼켰다. 그러고보니 이후로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별미 조합인 듯하다. 고추장 단지를 당장 닫으라고 으름장놓던 동생은 결국 같이 못 있겠다며 다른 기차칸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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