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가 이상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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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6 귀환 후의 책과 나무
호주에서 돌아오며 지원이에게 남은 호주 달러를 모두 건넸다. 지원이가 매번 밥을 사겠다고 고집을 부린 덕에 꽤 많은 돈이 남았다. 20만원 가량 남았는데, 공항에 배웅나온 지원이에게 쥐어줬더니 얼굴이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자기 애인을 돌아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야 얘가 나한테 20만원 줬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친구가 자기 사는 나라에 놀러왔으니 호기를 부리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데, 막상 넉넉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속상한 기분. 그 기분은 왜 꼭 이런 순간에 표출되어야 하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 어쨌든 그렇게 지원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호주에 대한 책 세 권을 읽었다. 모두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젊은이들이 쓴 책이었고 그중 두 권은 소설이었..
2024.10.15 -
시드니 5 동네 탐방기
며칠 지나 지원이가 더 이상 우리를 끌고 다니지 않게 되자 나와 현경은 둘이서 제멋대로 동네 체험을 다니기 시작했다. 유스호스텔 근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와인 한잔을 들고 동네 (영어) 연극을 보다가 정신없이 졸기도 했고 항구의 컨벤션 센터에서 LG 기술로 만들었다고 크게 써진 아이맥스 영화를 보기도 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시장 탐방도 여러 군데 갔다. 어시장에서 랍스타를 먹고 부촌의 슈퍼마켓에 가서 농산물과 향신료 코너도 한참 구경했다. 이런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의 주패턴이었다. 그 도시에서 뜨는(?) 동네를 알아내서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걷다가 슈퍼와 상점들을 들어가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동네에서 엄청 큰 체육관을 구경하게 됐다. 어느 정도는 축소 규모이긴 하나, 야구..
2024.09.04 -
시드니 4 캥거루와 코알라
호주의 동물들을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원이가 자꾸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이곳저곳(카지노, 담배 필 수 있는 공원, 쇼핑몰, 중국 음식점)으로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동물원에는 뭐하러 가! 쓸데없이!” 하고 타박을 주었다. 그래도 코알라는 반드시 보아야 했다. 아니, 호주에 와서 코알라도 못 보고 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캥거루는 뭐 그냥 그래도, 반드시 코알라를 만져볼 수 있게 해주는 동물원을 가야만 했다. 지원이도 결국 체념하고 (동물 보호에 좀 허술한) 가까운 소규모 동물원을 알려주었다. “거기 가면 코알라를 만지고 꼭 껴안게 해줄 거야.” 과연 허름한 동물원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교외에서 운영되며,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인터넷 악평에 시달리는, 가끔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도 등장하는 그..
2022.08.10 -
시드니 3 유스호스텔의 중년
나이 들어 유스호스텔에 묶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젊은이들의 열기를 회춘약 먹듯 빨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중년인 내가 요즘 가는 호스텔들은 청춘의 공간이라고만 하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시드니에서 묶던 유스호스텔도 그랬다. 비쌌으니까. 4인실이나 6인실의 침대 하나를 하룻밤에 5만원이나 주고 묵을 젊은이는 많지 않다. 환율인지 생활수준인지의 이득을 보는 북구의 젊은이들이라면 또 몰라도. 어쨌든 그곳은 인기 폭발이었고 한달전에 예약을 했음에도 나는 이틀을 다른 숙소에서 보내고 나서야 그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가보니 유색인은 거의 없었고 온통 길쭉한 금발들뿐이었다. 칙칙한 호텔에 있다가 사방에 세련된 디자인의 그래픽과 문구들이 씌어 있으며 멋진 가구와 주방용품을 세심하게 비치한 그곳에 짐을 풀고 나자 ..
2022.06.08 -
시드니 2 카지노와 담배 체험
그날 저녁에는 당연한 것처럼 지원을 다시 만났다. 지원은 해외 체류 친구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를 냅다 한국 음식점으로 데려갔고 호주 음식에 대한 기대가 없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오히려 신기해하며 오묘한 호주산 한식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원이 데려간 곳은 커피숍도 아니고 카지노였다. 그래, 지원이 원래 도박을 좋아한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원의 태도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도박이 금지된 한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휘황한 도박장을 구경시켜주고 재미 좀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솟는 듯했다. 이미 마카오의 휘황한 도박장들을 실컷 보고 온 나이고 카지노 정도야 할리우드 영화에도 매일 나오는 판인데 굳이 싶었지만 어쨌든 지원을 따라서 가본 도박장은 꽤 허름했다..
2022.04.25 -
시드니 1 마지막 휴가는 나이 많은 연인들과 함께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나는 유럽, 아프리카(이집트), 아시아(일본, 캄보디아)에 걸쳐 무려 세 대륙을 가보았고 아메리카 대륙은 괌으로 살짝 맛을 봤다고 우기면, 이제 호주만 가면 5대륙 완전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싸… 그렇게 해서 순전히 대륙 구색 맞추기를 위해 호주 여행을 계획했다. 호주에는 친구(현경)의 친구(지원)가 살고 있었다. 현경을 꼬셨다. 지원이를 만나러 같이 가보자고. 현경은 망설였다. 해외 여행은 가고 싶지만, 호주도 좋지만, 지원을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게다가 지원은 시드니에 살고 있었다. 그때 호주에서는 한창 맬버른이 핫하고 힙한 도시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아무리 돛단배 모양 오페라 하우스가 멋지다고 해도, 시드니는 너무 구리지 않냐는 요즘 중론이 있었다. 현경에게..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