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추억(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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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은 처음 2, 독일에서 한국 도서전
드디어 전시가 개막하고, 이제 일주일 동안 순번을 나누어 전시장 지키기와 관리만 하면 되는데, 사고가 터졌다. 자원봉사자들이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밤중에 불이 난 것이다. 사실 우리 직원들 숙소보다 한 급 낮은 자원봉사자 숙소 때문에, 그리로 보내진 직원들이 불만을 표현했던 차였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자원봉사자 처지가 되었던 우리 회사 직원들은 무척 놀라고 무서웠을 것이다. 새벽녘에 짐도 못 챙긴 채 뛰쳐나왔다가, 다른 직원들이 있는 제대로 된 호텔로 이동한 자원봉사자 처지의 직원들은 아늑한 방에서 나와 마주한 채 불같이 화를 냈다. 고소 운운하는 말까지 나왔다. 자기들이 그 숙소에 묵게 된 과정 자체가 불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새로 호텔방을 배정해주고 하루 쉬면서 옷가지를 사도록 돈을 주고..
2019.12.04 -
출장은 처음 1, 독일에서 한국 도서전
20대 후반에 일본을 길게 다녀온 후, 30대 중반이 되도록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갔다. 그 나이 또래가 많이 그랬듯 워커홀릭으로 살던 시절이었다. 주중에는 (술자리를 포함해서) 밤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멍하니 티비를 봤다. 휴가철이 되어도 3일 이상 휴가를 내기가 힘드니, 국내 바닷가에 잠깐 다녀오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자 참다못한 애인은 혼자 장기 휴가(그래봤자 일주일)를 내고 해외여행을 나갔다오기도 했다. 그 나이 또래가 슬슬 그러기 시작했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내가 일하던 전시기획사에서 독일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회(박람회)를 기획하게 됐다. 반 년 이상의 준비끝에 스무 명 정도의 직원들이 프랑크푸르트로 2주 동안 출장을 가게 됐다. 직장에서 해외 ..
2019.12.04 -
배낭족 5 부다페스트의 첼리스트와 파리의 사수생
오래전 떠났던 유럽 배낭 여행은 원래 두 달 예정이었다. 비행기 표를 그렇게 끊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리저리 헤매다닌 지 한 달이 되어가자, 나는 이십대 초반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하고 정신적으로도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널부러져 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다페스트에서, 우연인지 동유럽은 원래 그랬던 건지, 아주 값싸고 괜찮은 숙소를 얻었다. 명성대로 인형 같은 외모의 헝가리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텅빈 학교 교실에 책상들을 붙이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 배낭 여행자들에게 내주면서 하루에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 화장실 시설이 나쁘지도 않았다. 개혁개방 초기, 자본주의가 밀려들기 시작한 초반의 동유럽이었어도 샤워실까지 있는 고등학교 시설은 한국보다 훨씬 좋..
2019.03.08 -
배낭족 4 밤기차와 동반자
그 다음부터는 여행 일정이 뒤죽박죽이었다. 숙소를 안 잡고 계속 밤기차를 탔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숙박비를 많이 낭비(?)했기 때문에, 정액권인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당분간 기차에서 취침을 해야 했다. 밤기차의 침대칸을 숙소로 삼기 위해서는 잠들기 직전에 기차를 타서 깨어난 직후에 내릴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았다. 유럽을 상하로 이동해서는 그 거리가 제대로 안 나오고 북유럽은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좌우, 즉 동서로 이동을 해야 했다. 오늘은 스페인, 내일은 헝가리, 모레는 이탈리아, 글피는 체코, 뭐 이런 식으로 유럽 대륙을 지그재그 수놓으며 젊은 체력을 탕진했다. 그러다보면 교통의 요지를 많이 거치게 되는데, 프랑크푸르트는 다섯 번쯤 들른 것 같다. 하지만 첫날 기차역에서 역무원에게 ..
2019.03.04 -
배낭족 3 남프랑스의 히피와 요양원
그래도 정말 첫 해외 여행다운, ‘눈이 번쩍 뜨이는 문화 체험’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아비뇽의 거리예술제(프린지페스티벌)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일부러 시간을 맞춰 갔을 리는 없고, 아마도 우연히 얻어걸린 며칠 동안, 글로만 읽던 서양의 히피 문화를 거리 공연자들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었던 신기한 체험이었다. 사실, 길가에 벌거벗다시피 누워 한참을 흐느적거리며 신음하던 여자 무용수 말고는 별로 기억 나는 게 없지만…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아를에서도 공연을 하나 보긴 했다. 그곳은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는 소도시였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 거기서, 역시 우연히도 록그룹 산타나의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물론 원형 경기장이란 곧 야외 공연장인 셈이니 뻥 뚫린 천장으로 엄청난 음량의 공연 음악이 고..
2019.03.04 -
배낭족 2 파리의 욕망이 향하는 곳
영국을 떠난 나랑 동생은 당연히 파리로 향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파리 중앙역에 내렸는데 웬 중년의 백인 남자가 한국어 손글씨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우리에게 곧장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좋은 방 있어요’ 나랑 동생은 놀란 눈으로 덤벼들다시피 종이를 받아들고 자세히 뜯어보았다. 남자는 서툰 영어로 자기 집에 남는 방이 있는데 싼 값에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물론 공중전화를 써야 했던 시절이다. 남자가 내민 전화기 너머에서는 젊은 한국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다시피 통화를 하고 나서 설명을 들은 대로 지하철을 타고 파리 교외 지역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먼 길이었다. 한 시간쯤 걸리는 듯했고, 지하철 역에 내려서도 작은 계곡 같은 곳 옆으..
2019.03.01 -
배낭족 1 영국의 자매와 고추장
슬슬 대학 생활이 싫증 날 무렵, 3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으며 원없이 놀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다. “미국으로 6개월 어학 연수 갈래, 유럽으로 두 달 배낭 여행 갈래?” 왠일로 큰돈을 대줄 뿐 아니라 선택의 옵션까지 주겠다는 거였다. 난 당연히 두 달 유럽 배낭 여행을 선택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과 동생의 친구 한 명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우리 여자 셋은 거의 자기 몸집만 한 크기의 배낭을 사고 서울의 여행사에서 왕복 항공권과 유레일 패스를 샀다. 숙박은 런던 도착 첫날 단 하루만 어느 호텔을 예약했다. 다른 정보나 그 외의 준비는 [세계를 간다]라는 두꺼운 여행책 한 권이 전부였다. 비행기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던 시절이었다. 7월이었지만..
2019.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