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족 5 부다페스트의 첼리스트와 파리의 사수생

2019. 3. 8. 14:04유럽의 추억

오래전 떠났던 유럽 배낭 여행은 원래 두 달 예정이었다. 비행기 표를 그렇게 끊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리저리 헤매다닌 지 한 달이 되어가자, 나는 이십대 초반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하고 정신적으로도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널부러져 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다페스트에서, 우연인지 동유럽은 원래 그랬던 건지, 아주 값싸고 괜찮은 숙소를 얻었다. 명성대로 인형 같은 외모의 헝가리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텅빈 학교 교실에 책상들을 붙이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 배낭 여행자들에게 내주면서 하루에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 화장실 시설이 나쁘지도 않았다. 개혁개방 초기, 자본주의가 밀려들기 시작한 초반의 동유럽이었어도 샤워실까지 있는 고등학교 시설은 한국보다 훨씬 좋았다. 심지어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다니던 도도한 트렁크족들도 일단 들어와 보고는 며칠 더 머물다 갔다.


그 학교에서 나는 3일 정도 쓰러져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내 사진을 보면 피폐했던 심신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래서인지 부다페스트에서 처음으로 동성인 여성 동반자를 만났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취약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성을 만나 어울려 놀 엄두가 안 나나 보다.


그녀는 첼로 유학을 온 한국인이었다. 숙소 앞에 생선 튀김 샌드위치 노점상이 있었는데, 거기서 몇 끼를 해결하다가 그녀를 만났다. 유럽에서 만난 여자 유학생들이 그렇듯 브라를 안 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원래는 서로 한국인인 걸 알아보고 몇 마디 인사치레를 건넨 후 헤어지는 분위기였는데, 그녀가 돌아서다 말고 머뭇머뭇 다시 나를 보았다. “혹시 내일 나랑 같이 놀러다닐래요? 아마도 뭔가 더 물어보고 싶어하는 나의 태도, 혹은 이대로 날 내버려두지 말라는 나의 눈빛이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함께 멋진 관광을 했지만, 그녀가 나를 그 이상 책임져 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이제 그만 여행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항공사에 전화를 해서 귀국 비행기 표를 앞당겼다. 이후로는 오랫동안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떠돌이의 삶은 한 달이 한계였던 것 같다.


출발지인 파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좀 쉬었더니 체력이 회복됐는지, 아니면 이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기운이 났는지, 다시 남자애들 세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만나 며칠 안 남은 파리에서의 일정을 같이 다니기로 했다. 나는 그애들을 따라다니면서 여행 초기에는 못 가보았던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기도 했고, 센 강에서 유람선도 탔다. 그런 호화(?) 일정은 계획에 없었지만,  여행 내내 하도 아끼며 다녔더니 돈은 넉넉히 남아 있었다.


어쨌든 이 남자애들은 나보다 부유한 집안인 것 같았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는 어릴 때 파리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제대로 된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부모님들끼리 친구라 어릴 때 같이 어울려 놀다가 대학생이 되어 한국의 아이들이 놀러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교포 청년의 신분이 묘했다. 우리는 모두 대학생인데, 그 아이는 파리의 대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그랑제콜’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 당시는 어눌한 한국말로 설명을 들어서 의아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게 뭔지 안다. 말하자면 그애는 재수생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4수생이었지만, 그애 말로는 그게 보통이라고 했다. 정식 교육과정은 아니었지만 그랑제콜 예비학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엘리트 교육기관들인 셈이니까 말이다.


그애는 그랑제콜 지망생답게 어느 철학자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는데, 자신은 ‘볼테르’를 좋아한다고 말하여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 사람 굉장히 옛날 사람 아냐?”라고 물었고 그애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게 왜 이상한지 전혀 이해를 못해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