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5. 17:53ㆍ호주가 이상해
호주에서 돌아오며 지원이에게 남은 호주 달러를 모두 건넸다. 지원이가 매번 밥을 사겠다고 고집을 부린 덕에 꽤 많은 돈이 남았다. 20만원 가량 남았는데, 공항에 배웅나온 지원이에게 쥐어줬더니 얼굴이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자기 애인을 돌아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야 얘가 나한테 20만원 줬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친구가 자기 사는 나라에 놀러왔으니 호기를 부리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데, 막상 넉넉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속상한 기분. 그 기분은 왜 꼭 이런 순간에 표출되어야 하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
어쨌든 그렇게 지원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호주에 대한 책 세 권을 읽었다. 모두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젊은이들이 쓴 책이었고 그중 두 권은 소설이었다. 하필 이때 호주에 대한 책이 쏟아져나온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 눈에 띄었을 뿐일까.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는 논픽션이었다. 소설 두 권을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맨 나중에 읽었는데, 과장되고 극적인 이야기 두 편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되어 주었다. 냉랭하면서도 뜨거운 문체가, 여행을 다녀와서 소설까지 읽고 히죽거리던 내 정신을 화들짝 깨워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경험과 문학에 비하면 논픽션의 힘은 약했다. 지금 기억 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호주 어학 연수기였다. 호주에 갔다가 어학 시험 출제자를 우연히 만나, 기출 문제가 가득 쌓인 그의 집 지하실을 털고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여정에서 만난 희한한 인물들과 있을 법하지 않은 온갖 사건들이 난무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그런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남의 모험과 고생을 읽는 건 환상적이었다.
그러고 나서 [한국이 싫어서]가 출간돼 헬조선 담론과 맞물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 가려다 실패한 아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걸로 짐작되는데, 거의 르포에 가까운 사건들의 현실성과 약간의 상징성(그 시대의 청춘)이 어울려 탄생한 걸작이었다. 촛불 혁명과 탄핵 이후로는 그래도 헬조선 소리가 많이 줄어들고 이민 타령도 좀 잦아들지 않았나 싶은데, 어떤가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 꽃시장에도 유칼립투스 화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시드니에서 돌아온 후에야 반려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꽃시장을 드나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동네 꽃집에서 유칼립투스 화분들을 알아보고 관심을 가지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묘하게 이국적인 이파리 모양들과 가지를 흔들어주면 날리는 상쾌한 향기가 사랑스러운 작은 나무들이었다.


그제야 시드니 거리를 걷다보면 묘하게 떠돌던 향기들이 꽃 향기가 아니라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현경과 지원에게 계속, “어디서 자꾸 좋은 향기가 나. 어디서 나는 걸까?” 하고 물었고 지원이도 현경이도 답을 하지 못했더랬다. 거대한 가로수들의 이파리도 가지도 그다지 색다른 모양이 아니라 평범한 모양이어서 설마 얘들한테서 그런 향기가 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 화분에 심긴 어린 나무들, 즉 유묘들은 너무 귀여워서 자꾸 눈길을 사로잡았고 흔들면 향기가 난다는 상인들의 안내를 듣고 냄새를 맡자 연관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답삭 사들고 와 몇 번이나 키워보려 한 유칼립투스 화분들은 불행히도 나와 인연이 없는지 잘 키우지 못하고 번번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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