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의 외국인, 캄보디아 1

2020. 1. 28. 17:47동남아를 찾아서

나에게는 한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있다. 어릴 때는 사이가 안 좋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친하게 지낸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타인 중 하나였으니까 그만큼 쌓인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는 그녀와 같이 간 해외여행이 가장 길었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같이 다닌 여행이 꽤많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둘이 긴 해외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까. 

 

연년생 자매의 사이란 어때야 하는 걸까? 우리 자매의 사이를 설명할 여러가지 표현이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얘기할 때가 가끔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등하교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고. 동생과 함께했던 첫 유럽여행 때, 2주가 채 안 되어 헤어진 이야기는 이전 글에 썼더랬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흘러, 내가 어느 회사를 다니다가 번아웃 되어 퇴직했을 때, 동생은 마침 캄보디아에서 봉사단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캄보디아로 여행갈 계획을 세웠다. 비행기표만 사면 숙소와 교통편, 일정 등 모든 것이 해결되는, 최고로 팔자 좋은 여행이었다. 

 

동생은 당시만 해도 많이 가난했던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방 두 개짜리 좋은 아파트에 청소도우미까지 두고 살고 있다고 했다. 아직 삼십대 초반에, 저개발국 봉사단으로 우리나라 정부에서 최소 생활비만 받는 애가 말이다.

 

그런데 가기 전에 동생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가 동생이 옆자리 친구와 하는 얘기를 주워 들었다. "제일 더운 때라 그게 걱정이지." 나는 즉시 동생에게 "야, 나 말소리 들었어! 제일 더울 때 나 오라고 부른 거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직장을 그만 두고 놀러가게 된 거면서 왜 그런 투정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와서 잘 쉬면 된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4월의 캄보디아는 정말 더웠다. 그때가 건기로, 적도의 햇빛을 식혀줄 소나기(스콜)가 전혀 오지 않는 시기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캄보디아 인들이 다들 쓰고 다닌다는 격자 무늬 스카프, 즉 끄러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녔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 맞춰 휴가를 낸 동생과 프놈펜 시내의 호텔과 카페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막 공포정치에서 벗어난 나라라서 별다른 관광지가 없었기에 그랬는지, 시장 한두 군데를 구경한 이외에는 별달리 갈 데가 없기도 했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영장과 음료수 순례를 이어갔다. 우선 아침에 동생 집에서 과일 등을 챙겨 먹은 후, 동생이 가봤거나 가보고 싶었던 호텔의 수영장으로 간다. 아직 식민지의 유산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몇몇 호텔들은 제법 격조 있고 운치있었다. 게다가 수영장 입장료도 음료 가격도 아주 저렴했다. 거기서 수영복을 입고 수영도 하다가 선베드에 누워 책도 보다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오후에는 수영장이 딸린 카페들을 찾아가서 또 선베드에 누워 있다가 물속에 들어가는 일을 반복한다. 음료수만 시키면 수영장은 따로 돈을 받지 않는 멋진 카페들이 몇군데 있었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 두 자매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나서 프놈펜에 몇 안 되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역시 저렴한 편이지만 시설도 음식도 당시 한국의 웬만한 곳보다 센스 있어 보였다. 그런 곳에선 동생의 동료와 마주칠 때도 있었다. 그런 식당의 실내에 모여든 프놈펜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동생은 이들이 상류층 중의 상류층이라고 말했다. 근대와 현대 사이 어디쯤의 시절 동안,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신분 이동을 겪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저개발국에서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또 어느 카페나 술집으로 가서 후식을 먹거나 칵테일을 즐긴다. 일주일 동안 하루에 네다섯 군데 장소를 옮겨다니면서 십여 잔 가까운 음료수를 주문해 마신 것이다. 나는 동생과 "와 그런데도 2만원 밖에 안 들었어. 신난다." 하고 낄낄대면서 문득 내가 지금 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열대 여행을 나만 하진 않았을 것으로, 나중에 우연히 본 [열대 탐닉]이라는 책에 비슷하고도 다양한 형태로 묘사된 걸 보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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