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1. 19:32ㆍ일본에서 덜덜
20대 후반에 떠난 첫 일본 여행에서 일주일 동안 본토(혼슈)의 도쿄와 교토를 다녀왔더랬다. 오사카는 안 갔지만, 뭐,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별로 다를 것 같지 않고. 그래서 30대 중반에 다시 일본 여행을 마음 먹었을 때는, 열도의 남쪽에 위치한 두 번째 섬, 규슈에 가보기로 했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따뜻한 남쪽으로 가자는 심산도 있었다. 실제로는 전혀 따뜻하지 않아서, 수시로 “사무이(춥다)!”를 외쳐댔지만.
단, 저번처럼 여행을 오래(?)하기는 좀 아까웠기에, 일정을 3박 4일만 잡았다. 그러나 규슈는 거의 남한과 비슷할 정도로 큰 섬이이었다. 다(?) 가볼 수는 없었고, 우리는 섬을 반 바퀴만 돌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후쿠오카, 유후인, 아소산, 구마모토,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쭉 기차를 타고 달리기로 했다.
그때는 아직 열애중일 때라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기 짝이 없는 빨간 파카를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간단한 배낭만 짊어진 채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후쿠오카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리다가 전 직장 상사였던 커플과 마주쳤다. 안 그래도 우리와 악연 같은 게 있던 커플이어서 식겁했다. 하필이면 같은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게다가 당연히 이코노미석을 타고 갔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상위 클래스 좌석에서 내리는 듯했다. 기분이 괴상해졌다.
그러고 보니 둘이 온천을 좋아해서 아이들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주 여행을 간다던 말이 기억났다. 한 번은 회사에서 일이 터졌는데, 그 둘이 경기 북부의 온천에 왔기 때문에 길이 막혀서(?) 급히 돌아오기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들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경기 북부의 온천이 아니라 규슈라도 갔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규슈에는 벳부처럼 온천으로 유명한 고장이 많고 사실상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이라, 주말에 갔다올 수 있을 정도로 교통편(?)도 간편했다. 물론 길은 막힐(!) 테니 쉽게 돌아올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눈만 살짝 마주친 양 커플은 곧바로 서로를 외면하고 제갈길을 갔다.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곧바로 신칸센 기차를 타고 규슈 섬 동쪽의 유후인에서 첫날을 보냈다. 둘쨋날은 규슈 섬 중앙의 활화산인 아소산을 관광한 후 서쪽의 구마모토 시로 갔다가, 마지막 밤은 규슈섬 서쪽 끝의 항구이자 섬인 나가사키에서 보내는 일정이었다.
유후인은 당시 한국에서 갑자기 유명세를 탄, 아기자기한 관광 마을이었는데 그곳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예쁜 카페들 한구석을 차지하고 밥이나 커피를 먹던 일본의 노인들이었다. 온통 젊은이들뿐인, 중년인조차 보이지 않는 한국의 카페들과 달린, 일본의 카페들에선 꽤 많은 노인들이 당당히 서비스를 받을 뿐 아니라 서빙을 하고 있기까지 한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지방, 즉 시골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또 놀랐다.
아소산은 순전히 남의 로망으로 코스에 넣었던 거였는데, 나로서는 활화산의 유황 냄새에 질겁했을 뿐이었다. 풍경도 별로 신비로운 줄 모르겠는데, 대체 왜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 걸까. 아소산을 내려와서 그 아래 마을에 머물 때는, 밤에 술집에 갔다가 두 번째로 질겁했다. 무심코 시킨 일본식 소주 때문이었다. 한국의 달달한 소주와 달리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순수한 소주의 향에 놀랐던 것이다. 지금이야 오히려 이쪽이 더 좋지만 말이다. 그래도 미니어쳐 기념품 소주병을 두어 개 사왔는데, 거의 최근에야 소비할 정도였다.
나가사키에서는 카스테라와 짬뽕을 찾아 나섰다가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휴무일과 영업 시간을 미리 조사하지 않은 불찰에다가 긴 줄이라는 복병도 만났기 때문인데, 준비성을 탓하기 애매할 때 커플은 서로를 탓하며 싸우게 되기 마련이고, 나름 우여곡절이 있던 3박4일의 마무리로 꽤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규슈 절반을 도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사실 에키벤이었다. 에키벤은 역(에키)+벤토(도시락)의 뜻으로 기차역마다 파는 특산품 도시락을 의미한다. 별로 들른 곳도 없이 기차역들마다다 도장 찍듯 후쿠오카-유후인-아소산-구마모토-나가사키를 주파하며, 각 역에서 파는 맛있고 예쁜 도시락들만이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최고로 맛있었고, 왠지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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