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3. 20:17ㆍ일본에서 덜덜
지구에서 서양력으로 새천년이 시작되던 즈음, 도쿄에는 나의 친구가 취업해 일하고 있었고, 교토에는 애인의 친구가 취업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프로그래머였다. 그때 한창 인터넷 붐을 타고 인력이 부족해진 일본에서 한국인 프로그래머를 왕성하게 수입했더랬다. 서울에는 프로그래밍과 일본어를 동시에 가르쳐주는 학원들까지 반짝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므로 나는 애인이랑 공짜 숙소(친구들의 집)가 마련된 일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여름 휴가를 내서, 도쿄에서 5일, 교토에서 5일 머물기로 했다. 앞뒤 주말을 껴서 말이다.
사실 내 친구의 집은 도쿄가 아니라 요코하마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쯤이랄까. 친구는 요코하마의 전형적인 일본식 원룸에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마치 연립주택처럼 옆으로 길게 지어진 2층 목조 건물에 위아래와 옆으로 열 세대쯤 원룸이 늘어서고 그 앞의 꽤 큰 마당을 공유했다.
원룸은 비좁았지만 내부에는 사다리로 올라가는 복층이 있었다. 딱 더블 사이즈 크기여서 마치 2층 침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복층 아래는 싱크대와 수납장이었고 방가운데는 그 일본 특유의 화로 구실도 하는 앉은뱅이 탁자(코타츠)가 거실 탁자처럼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는 책상, 왼쪽에는 현관과 욕실문이었는데, 욕실은 UBR 혹은 유니바스로 불리는, 특유의 누런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일체형이었다.
내 친구 철수는 역에서 우리를 만나 택시를 잡았다. 일본에서 택시를 탈 때, 문이 저절로 철컥 열릴 때마다 놀라는 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으니, 그때는 더욱 놀랐을 것이다.
철수는 우리를 자기 집 근처 ‘일식’ 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철수가 선호하는 바 자리에 조르르 앉으니 반찬 같은 접시 세 개가 조르르 나왔다. 일본 주점에서 자릿세처럼 값을 받고 주는 기본 음식이라고 했다. 최근 늘어난 한국인 취업자들이 항의하거나 '이라나이(필요없어)!'라며 화를 내는 경우가 있어 창피하다고 했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는 내가 아직도 그 네 글자는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나도 창피하다고 느꼈나 보다.
나랑 애인은 철수의 요코하마 집에서 기식하며 도쿄 관광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저장된 한국산 카레 레토르트와 동결건조 북엇국으로 밥을 해먹고 철수를 회사로 보낸 다음, 좀 치우고 도쿄로 나오면 거의 정오였다. 저녁에는 도쿄에서 를 철수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요코하마의 원룸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그래도 친구네 집에서 자는 신세를 갚으려고 나는 아침을 열심히 만들고 설거지에 더해 청소까지 조금씩 해주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3일째날 밤쯤엔 철수가 심경 같은 걸 좀 털어놓았다. 우리처럼 철수네 집에서 자고간 친구들이 그동안 정말 많았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바로 옆 나라인 데다가 취업해서 집까지 있는 친구가 드물었을 테니.
어떤 친구들은 매일 아침을 해먹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싸서 관광을 나가는 생활을 2주 동안이나 했고, 그녀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쓰레기를 치우고 청소를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청소에 정리까지 해줘서 고맙다고, 그 동안 친구들 방문을 받은 중에 제일 좋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우리 셋은 그날 밤 음악을 틀고 맥주를 마시며 거나하게 취했다. 그리고 문단속을 잊고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철수의 요코하마 원룸에는 마치 거실처럼 전면창 겸 미닫이 문이 앞쪽으로 나 있었는데, 그걸 열어놓고 놀다가 그냥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철수의 카메라와 지갑이 없어졌다. 나랑 애인의 물건은 무사했다.
신분증까지 없어진 철수는 절망했고 나랑 애인은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시끄럽게 음악을 틀었고, 화가 난 이웃사람이 도둑질해 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내 동생의 애인이었던 철수는 내 동생에게 차이고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일본으로 취직을 떠나게 된 것도 내 동생의 권유였는데, 애인은 떠나고 일본에 홀로 추방된 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철수는 내 동생을 원망하는 기색도,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우리의 여행에 잠자리를 제공하고 같이 놀아주었다.
물론 지갑과 카메라를 도둑맞은 다음에는 많이 화가 났던지, 문 잠긴 집 밖에서 우리가 3시간을 기다리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정도 어깃장/방치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물론 마음씨 좋은 철수는 그후로도 나의 좋은 친구로 남아주었다. 최근 들으니, 아침 먹고 점심저녁 도시락까지 싸다녔다던 친구들과도 더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첫 도쿄 여행은 관광한 곳은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요코하마의 친구에 대한 애틋하고 미안한 기억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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