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30. 15:54ㆍ중동이라니
성지순례에서 왜 터키를 가는지도 의아했다. 그냥 부모가 섭외한 여행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몸만 따라간 패키지 여행이었으니 아무 사전 공부가 돼 있지 않았다. 전세 버스 안에서 마이크로 울려퍼지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그제야 백지 같던 머릿속을 채웠다. 알고 보니 터키는 고대 로마 유적의 보고일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후반부, 예수의 사후에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펼친 곳이었다. 하긴 터키는 옛날에 동로마 제국이었고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게 동로마 제국이니까.
이스탄불에서 짧은 궁궐과 박물관 관광을 마치고 터키 전역을 일주일에 걸쳐 도는 일정을 위해 전세 버스에 올랐다. 터키는 매우 큰 나라였다. 버스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시간이 몇날 며칠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유적, 트로이 유적 같은 고대 문명 유적지도 들렀지만, 대체로 전도서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성지화되어 있었다. 음… 몇 군데 갔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고린도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보다는 전세버스에서 내내 성가를 부르고 묵주기도를 하느라 미쳐 버릴 뻔했던 기억이 더 생생히 떠오른다. 어느 성지에 내려서는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라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조폭처럼 보였던 신부의 집전으로 말이다. 그는 정말 신부였고 가방에 사제복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다른 미사 순서를 지켜볼 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가 경건하게 금잔에 담긴 하얀 성체와 붉은 포도주를 축성하고 사람들에게 영성체를 해주던 부분에선 기분이 묘했다. 나조차 신성함을 느끼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또한 이것은 엄연한 패키지 여행이었다. 긴 버스 여행에 시달리는 중간중간, 우리는 또 내려서 기념품 쇼핑을 강요당해야 했다. 어느 가죽 옷 상점에선 멋진 서양인 모델들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만을 위한 패션쇼를 펼쳐 보여 더욱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죽 코트를 사지 않았다.

그렇게 터키 여행을 다녀온 후, 내 주변에도 종종 터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생기곤 했다. 그들의 경험담은 나의 경험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터키 젊은이들과 직접 교류하고 내키는 대로 그 넓은 땅을 휘젓다 온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도 관광지 휴게소 비슷한 곳에 들를 때마다, 작은 종 모양 찻잔에 립톤 홍차를 두세 개씩 넣어 진하게 우려 내어주던 터키인들을 만났지만, 인사 이외의 말은 주고받지 못했다.
게다가 터키 전역을 일주일 가까이 버스를 타고 누볐으면서도 그 유명한 파묵칼레와 가파도키아에는 가보지 못했다. 성지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들에게 터키에 가봤다고 말하면 꼭 파묵칼레와 카파도키아에 가봤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몇 번이나 있다. 욕망(허세)와 미덕(정직)은 결합되기 힘든 조합이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글을 쓰고 나서 옛날 사진들을 뒤지다보니, 우리 일행이 파묵칼레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욕망이란 참 묘하다. (1)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믿고 나서 (2)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3) 죄책감을 느끼고 (4) 그걸 또 폭로해서 재미있는 글을 쓰려 했던 인간의 복잡한 심리 덕분에 여행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도 모른다.

'중동이라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지순례 3 이스라엘의 국경과 사해 (0) | 2019.05.21 |
---|---|
성지순례 1 이집트의 무덤집들과 시나이 산 (0) | 2019.04.23 |